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 (문단 편집) === 로스앤젤레스 시절 === 그러나 이미 창단 때부터 푸대접해온 오클랜드시는 우승도 했겠다 하여 홈구장 콜로세움에 고액 좌석을 추가하겠다는 알 데이비스의 요청을 비용 문제로 거부했고, 열받은 알 데이비스는 더 큰 시장을 원한다는 명분으로 마침 [[1984 LA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던 [[LA 콜리세움]]이 [[LA 램스]]의 홈구장 이전[* 콜로세움에서 MLB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홈구장이었던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으로 이전한 뒤, 결국 LA를 뜨고 세인트루이스로 갔으나, 다시 LA로 복귀했다.]과 대학팀 [[UCLA]]의 홈구장 이전[* 패서디나에 위치한 [[로즈 보울]].]으로 비어있는 걸 알고 1982년 LA 메모리얼 콜로세움과 임대계약을 맺고 LA 이전을 선언했다. 첫 시도는 1980년이었는데, 이 시도는 LA 램스의 영업구역 침범으로 간주되어 캘리포니아 법원에서 저지당했다. 그러나 알 데이비스는 이에 항의해 NFL을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소해버린다. 2년여에 가까운 재판에서 알 데이비스가 승소[* 여담이지만, 미국의 풋볼 [[독립리그]]인 USFL의 시작이 바로 이 알 데이비스의 승소 덕이다. 1986년에는 USFL의 운영에도 참여했다.]하자, 애초에 오클랜드 눌러앉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NFL 사무국측은 몇몇팀이 투표에 불참한 가운데 22-0의 만장일치로 LA 이전을 승인했고, 이에 이전을 강행했다. 이전 후에도 1980년 당시 우승 전력을 유지한 채, 오클랜드 말기 때인 1981년 드래프트에서 USC 출신에 전년도 하이즈만 트로피 수상자인 러닝백 마커스 앨런을 전체 10번으로, 빌라노바대 출신 수비엔드 하위 롱[* 선수 활동 중인 1984년 <대탈주>를 시초로 총 5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특히 1996년 <브로큰 애로우>에서 켈리 역을 맡아 특유의 비명소리로 화제를 모았다. 그 외에 ESPN, FOX Sports 등지에서 NFL 중계 해설위원을 맡았으며 그의 장남 크리스(1985년생)는 아버지와 똑같은 수비엔드로 버지니아대에서 활약한 후, 2008년 [[세인트루이스 램스]]에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입단하여 2018년 은퇴 시까지 3팀을 거쳤고, 그 뒤에는 인터넷 방송 [[https://youtube.com/c/GreenLightTube1|<그린라이트>]]를 진행 중이다. 차남 카일(1988년생)은 오리건대 출신으로 2013년 시카고 베어스에 드래프트 전체 20위로 입단하여 이듬해 프로 볼에 뽑혔다. 2019 시즌 도중 부상으로 빠진 뒤 2020년 2월에 은퇴를 선언했다가, 2021 시즌을 앞두고 캔자스시티 치프스에서 컴백했지만 부상으로 PUP 명단에 올랐다.]을 48번으로 각각 뽑으면서 전력이 더 올랐고, 1983 시즌 때 제18회 슈퍼볼(Super Bowl XVIII)에서 마커스 알렌의 맹활약으로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대파하고 통산 3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알 데이비스 구단주는 1987년 드래프트 때 MLB 캔자스시티 로열스 외야수로 활약하던 [[보 잭슨]]을 183번으로 영입하는 초강수를 뒀고, 동년 시즌 후 플로레스 감독이 프런트로 발령나자[* 1989년에 시애틀 시호크스의 사장 겸 단장으로 영전된 후 1992년에 감독까지 겸임했고, 1994년 경질된 후 1997년부터 21년간 레이더스의 라디오 중계 해설위원을 맡았다.] 전 [[덴버 브롱코스]] 공격 코디네이터 마이크 섀너한[* 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감독 [[카일 섀너한]]의 부친.]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문제는 이 두 요인에서 비롯됐다. 전자인 러닝백 보 잭슨은 오번대 시절 1985년 하이즈만 트로피 수상자로서 풋볼계의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그는 풋볼 대신 야구에 줄곧 뜻을 두다가 1987년에 알 데이비스 구단주가 스타급에 준하는 연봉을 약속하며 그를 낚아챈 것이다. 입단 때부터 구단주의 사랑을 받으며 야구 시즌이 끝난 뒤 필드에서 활약해 돈을 두둑히 받았으나, 문제는 그가 뛸 때가 풋볼 시즌 절반인 데다 훈련도 안 받았기 때문에 마커스 앨런 등 기존 주전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후자의 경우, 그동안 내부 인사만 감독으로 써온 알 데이비스 구단주는 첫 외부 출신인 마이크 섀너핸 감독이 자기 말을 안 듣기 시작하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미 10년 넘게 대학교에서 코치 경력을 쌓았고 NFL 공격 코디네이터로 4년이나 활동했으며 캐릭터가 강한 섀너한 감독의 자존심을 알 데이비스가 멋대로 휘두르자 제대로 충돌했다. 이렇게 둘이 싸우다 보니 팀은 급격히 난장판이 되었고, 이런 싸움에서 흔히 그렇듯 구단주 알 데이비스가 1989 시즌 도중 섀너한 감독을 일방적으로 잘라버렸다. 이에 따라 섀너핸은 덴버 브롱코스 쿼터백 코치로 되돌아갔고, 아트 셸 공격라인맨 코치가 감독으로 승진했다. 또한 잭슨도 부상에 시달리다 1990 시즌을 끝으로 풋볼 대신 야구에 전념했다. 1991년 드래프트에서 USC 출신의 '로보 QB'[* 평소 그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토드 마리노비치를 24번으로 지명했으나, 영아기 때부터 아버지 마브 마리노비치[* 오클랜드 시절인 1965년에 수비가드로 뛰었으며, 방출 후 트레이너로 전업했다.]로부터 받아 온 혹독한 근력 훈련 및 강압적 통제로 성격이 불안정해 마약까지 하자, 선수생활 내내 3회에 걸친 검사에서 불합격돼 1993년에 리그에서 제명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2011년 방송된 ESPN <30 for 30> - "Marinovich Project"에 나온다.] 다른 한편 마커스 앨런은 1992 시즌 후 캔자스시티 치프스로 이적했고, 하위 롱도 1993년에 은퇴함으로써 팀이 흔들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